2012년 1월 4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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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의 역사가 뭔가요?

저.........4학년 읽기책 31쪽 (2)번 씨름의 역사 좀 알려주세요.


내일까지고요............


안해오면........................아시다시피




입니다


저.........4학년 읽기책 31쪽 (2)번 씨름의 역사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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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씨름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남자 운동경기중에 하나입니다.


이 씨름의 역사는 고구려 시대로 올라 갈수 있는데 만주 통구에 있는


각서총현실 좌우의 벽에 벽화를 보면 씨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대에도 이미 씨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고려사를 보면 충혜왕이 씨름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보아


고려때도 성행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후 씨름은 남자들의 놀이로 단오, 백중날, 한가위등 명절과 농한기때


많이 했는데 단오절에는 여자의 널뛰기와 함께 연중행사로 치뤄 졌습니다.


그러다가 1910년애 이르러 씨름단체와 기관 주관의 아래 씨름 대회가 생기게


되고 천하장사에게는 황소를 주었습니다.

5학년인데요.


씨름의 역사는 음~~ 사람들에 의해서 번성되었는데요.


조선후기시대에 많은 번성을 했습니다.


원래는 천민이나 상민등의 사람들이 주로 했었습니다.



옛날, 인간은 맨손 또는 하잘것없는 연장 따위로 외적과 싸우기도 하고 짐승을 잡아 식생활을 해결하였다. 그러다가 차차 진보하여 칼이라든가 활 ·창과 같은 것을 만들게 되었고, 그것이 인류문명의 발달과 함께 스포츠화하여 달리기 ·던지기 등은 육상으로, 때리기는 권투로, 낚아채어 넘어뜨리는 것은 씨름 ·레슬링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이 원시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하였는지는 세계 여러 나라에 남아 있는 유적이나 서지에 나타난 자료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즉, 고대 그리스의 벽화에도 씨름하는 그림이 있고, 석가는 왕자 때 그 사촌인 제바달다()와 씨름겨루기를 했다는 기록이 불전에 나와 있다. 《예기()》 <월령편()>이나 장평자()의 《서경부(西)》를 보면 중국에서도 한무제() 때에 씨름이 가장 성행하였고, 진()나라 때에는 각저(觝)라고 불렀다는 것이 고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국의 씨름은 아득한 상고시대부터 행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태조 주몽이 왕위에 오르기계루부() 족장 때 5부족장()의 고추가(부족장의 존칭)시합이 있었는데, 이 시합종목이 각저 ·궁사() ·승마 ·수박()이었다고 한다. 특히 중국의 문헌에는 우리의 씨름은 고려기() 또는 요교(撩骹)라고 했을 정도로 중국의 각저희()나 일본의 스모[]와는 그 방식이 다르고 독특하였다.


한국에서 씨름에 관한 가장 오래 된 사료()는 1905년에 발견된 유물, 즉 옛 고구려 도읍지였던 환도성(:현 중국 ) 자리 각저총()의 현실()에 있는 벽화인데, 여기에는 씨름하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 고려사()에서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충혜왕()은 용사들에게 싸움을 하도록 하며 구경을 하였고, 또 고용보()와 거리를 행차()하다가 씨름경기를 보고 용사들에게 많은 포목()을 상품으로 하사하였다고 하였으니 충혜왕은 용사들이 씨름하는 것을 매우 즐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인 《세종실록()》에는, 세종 원년인 1419년 6월 15일에 상왕과 왕은 저자도()에 거둥하여 물 한가운데에 배를 띄우고 종친과 더불어 주안을 베풀고 강변에서 군사들이 씨름하는 광경을 보며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송경지()의 실록에 의하면 5월 5일 단오절()에 명절놀이로서 관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여아()들은 추천(鞦)놀이를, 남자는 각저의 희, 즉 씨름경기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정조() 때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 씨름하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



[출처] 씨름의 역사 | 네이버 백과사전

- 씨름의 역사 -



[기 원]


씨름은 여러 사람이 한 집단 또는 사회를 이루고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겼다고 짐작할 수 있다. 첫째로, 원시사회 사람들은 먹이를 구하거나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맹수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다른 핏줄의 집단과 생활권의 확보를 위하여 집단적으로 싸우기도 하였다. 이때 싸움의 방법으로 격투가 벌어졌을 것이니 이것이 곧 씨름의 시초로 보인다.


따라서 원시인들은 생존을 위해 격투기술을 점차 발달시켜 나갔으며, 여기에서 씨름이 1대 1의 격투기술로 개발되어 널리 응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간의 지적 향상과 집단의 정치적·경제적 발달에 따라 씨름은 무예로 발달해 왔다. 개인적 방어술이었던 씨름이 무술의 하나로서 발전하게 되는 것은 사회의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위험을 피해 동부여에서 졸본(卒本)으로 남하하여 그곳에 고구려를 세웠다. 이 나라는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때의 왕은 부족연맹의 장이었다.


주몽이 고구려의 임금으로 오르기 전 계루부의 족장으로 있을 때 5부족장들의 고추가(古雛加:족장의 존칭) 시합이 있었는데, 당시의 경기종목이 각저·궁사(弓射:활쏘기)·승마(乘馬)·수박(手搏) 등 다섯 가지였다고 한다. 고구려 초기에 씨름이 무예의 하나로 채택된 것으로 보아 더 멀리 부여에서도 이 경기를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4세기경으로 추측되는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角抵塚) 주실(主室) 석벽에 두 사람이 맞붙어서 씨름하는 모습과 심판하는 사람이 서 있는 그림이 보인다. 이 고분은 1905년에 발견된 것으로 만주의 통화성(通化省) 집안현(輯安縣) 통구(通溝), 즉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환도성(丸都城)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씨름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분묘 벽화에까지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을 보면 당시에 고구려인들이 씨름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알 수 있다. 백제와 신라의 씨름의 역사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무예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었을 것으로 미루어, 신라와 백제에서도 고구려 못지 않게 무예로서 씨름을 즐겼을 것이고 널리 보급되었을 것이다. 또한 신라 화랑도의 무술연마에 있어서도 씨름이 큰몫을 차지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고려시대]


우리 나라 문헌에 씨름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고려사≫이다. 이에 따르면 충혜왕 때 왕이 용사들에게 씨름을 시키고 친히 구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충혜왕 즉위년(1330) 3월조에 보면, “왕은 아첨하는 신하인 배전(裴佺)·주주(朱柱) 등에게 나랏일을 맡기고 날마다 내수(內豎), 즉 아랫사람들과 더불어 씨름을 하니 위아래의 예절이 없었다.”고 하였다.


충혜왕 복위 4년(1343)의 기록에서는, “이 해 봄 2월 갑진일에 임금이 용사를 거느리고 씨름놀이를 구경하였다.”고 하였고, 같은 해 5월조에는 “신묘일에 공주가 연경궁(延慶宮)으로 옮기자 왕은 주연을 베풀어 위로하고 밤에는 씨름놀이를 친히 구경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11월조에는 “병인일에 고용보(高龍普)와 함께 시가지의 누(樓)에 거둥하여 격구(擊毬)와 씨름놀이를 구경하고 용사들에게 많은 베를 상으로 주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써, 충혜왕은 노는 것을 좋아하였고, 특히 놀거나 잔치를 벌일 때에는 으레 씨름을 시키고 즐겨 구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씨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넘어온 씨름은 대중화되었다. 김홍도(金弘道)의 풍속도 속에 씨름그림(각력도)이 있는 것은 씨름이 그만큼 일반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예이다. 김홍도가 조선 후기의 사람인 것으로 보아 이때는 씨름이 나라 안에서 널리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실록≫ 권31 세종 8년(1426) 3월 25일의 기록에는 “두 사신이 목멱산(木覓山:지금의 남산)에 올라가 서울장안과 한강을 굽어보고 말하기를 ‘정말 좋은 땅이라.’ 하고 활을 쏘고 역사들에게 씨름을 시켰다.”고 되어 있다.


같은 해 4월 2일의 기록에는 “두 사신이 목멱산에 올라가 역사들을 시켜 씨름을 하게 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12년 윤12월 임자조(壬子條)에는, “형조에게 아뢰기를 중상총(重尙聰)이 양복산(梁卜山)과 씨름을 하다가 양복산이 죽었으니, 법에 의하면 마땅히 교수형에 처하여야 하겠지만 형을 한 등급(等級) 감하고 장례비를 감당하게 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3년 3월 병무조(丙戊條)의 기록에는 “경회루 북쪽에 임금이 앉아 종친(宗親)들의 활쏘는 재주를 구경하고, 또 역사 안사의(安思義) 등에게 씨름을 하게 한 뒤, 승패에 따라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고 하였다.


같은 달 임오조(壬午條)의 기록에는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군사들이 격구하는 것과 말타고 창던지며 활쏘는 것과 모구(毛毬) 치는 것을 구경하였다. 동시에 두 사람이 각각 피두창(皮頭槍)을 가지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서로 대들기도 하고 좌우로 충격을 주기도 하였으며, 혹은 다섯 사람의 역사를 모아 씨름을 시키고 등급에 따라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고 하였다.



≪명종실록≫ 명종 15년(1560) 5월조에는 “단오날에 동궁별감(東宮別監)으로 있는 박천환(朴千環)이 시강원(侍講院)에 와서 호소하기를, 지금 임금이 내리신 물품을 빈객(賓客:세자를 보좌하는 벼슬)인 원계검(元繼儉)의 집에 가지고 가다가 길에서 양반의 무리를 만났다.


그들이 억지로 씨름을 하자고 하였으나 듣지 않자 노하여 의복과 갓을 찢고 심지어는 회사(回謝)하는 글까지 찢어버렸다고 하였다. 이 말에 시강원에서는 임금에게 이 일을 아뢰어 양반 무리의 죄를 캐어물으려고 하였으나, 사실을 알아보니 천환이 먼저 유생들을 때리고 욕하고 나서 거짓말로 이처럼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에 왕은 ‘이것이 무슨 풍속이란 말이냐.’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사헌부에서는 명을 내려 씨름을 금하기까지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씨름이 크게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종실록≫ 현종 5년(1664) 갑진년 정월조의 기록에 “광주(廣州) 저자도(楮子島)의 어느 집 종이 같은 동네에 사는 세현(世玄)이라는 자와 씨름을 하였는데, 이기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 그를 찔러죽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씨름이 매우 성행하였음을 짐작할만한 사건이라 하겠다.



유득공(柳得恭)이 지은 ≪경도잡지 京都雜誌≫ 권2에 보면, 단오에 대한 대목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서울의 소년들은 남산 기슭에 모여 씨름을 한다. 그 방법은 두 사람이 서로 맞서서 허리를 굽혀 번쩍 들어 왼손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다리를 잡고, 또 오른손은 서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는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같이 일어서며 허리를 번쩍 들어 메어친다. 또 씨름에는 안걸이·밖걸이·돌려치기 등 여러 가지 재주가 있다. 중국 사람은 이 씨름을 일컬어 ‘고려희’ 또는 ‘요교’라고 한다.”


또 ≪동국세시기≫의 단오 대목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청년들이 남산의 왜장(倭場: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하였던 곳)과 북악(北嶽)의 신무문(神武門:서울 북악산 남쪽에 있는 경복궁의 북문) 뒤에서 씨름을 하며 승부를 겨룬다.


그 방법은 두 젊은이가 서로 허리를 구부리고 각기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또 왼손으로는 상대방의 허벅지에 끼운 샅바를 잡고 일어나서 상대방을 번쩍 들거나 혹은 다리를 걸어 메어치는 것으로, 이때 깔리는 사람이 지게 된다.


씨름의 기술은 안걸이·밖걸이·돌려치기 등 여러 가지 모습이 있으며, 그 가운데는 힘이 장사요, 손재주가 민첩하고 자주 내기를 하여 이기는 장정을 도결국(都結局:판막음장사)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도 이것을 배워 ‘고려기’니 ‘요교’라고 부른다. 단오날의 행사로서 이 씨름은 매우 성하여 서울을 비롯하여 각 고을마다 크게 벌인다.”


또, 같은 ≪동국세시기≫ 5월의 기록에 “금산(金山:오늘날의 金泉)의 풍속으로 해마다 단옷날에는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직지사(直指寺)에 모여 씨름을 하여 승부를 가리는데, 이 구경을 하러 모이는 사람들은 수천인이나 되었다.”라고 하였다.


또 ≪개성지 開城誌≫에 소개된 풍속의 기록을 보면, “5월 5일에 여자들이 잘 차려입고 경덕궁(敬德宮:왕위에 오르기 전의 李成桂의 사저)에 모여 그네를 뛰며, 남자들은 만월대(滿月臺:대궐터)에 모여 씨름을 한다.”라고 되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예술/체육 체육> 씨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9264 ]


고려 시대



씨름에 관한 최초의 문헌사의 기록은 15세기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이다. 충숙왕 17년(1330년)3월에 왕은 중요한 정사를 총신인 배전 주주 등에게 맡기고 매일 궁중에서 잡무에 종사하는 소동과 씨름을 하며 상하의 예의가 없었다는 기사이다. 충혜왕 4년(1343)2월 8일에 왕은 용사를 이끌고 씨름놀이를 하였다.

충혜왕 4년 11월 4일에 고용보와 시가에 행차하여 겨구 및 각저희를 보고 용사들에게 포목을 다수 하사하였다는 기사들이다.

이 기사를 볼 때 두가지 의미로 역사적 성격을 해석할 수 있다. 첫째가 고려당시에는 씨름을 왕이 직접 즐겼으며 궁내에서까지 행하여 졌다는 것이다. 둘째는 당시에 고려가 몽고에 침입으로 원나라 지배 아래에서 자주성을 잃고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씨름을 통하여 민족 자주성 회복과 실현의 염원을 표현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고려가 고구려의 옛 영화와 강토 회복을 계승하기 위해 건국되었나 고구려 조상들이 즐겼던 씨름을 자주성 잃은 고려 민중이나 왕들이 열심히 했다는 것을 당연하다.

조선왕조실록인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세종 원년인 1419년 6월 15일에 상왕과 왕은 저자도(楮子島)에 거둥하여 물 한가운데에 배를 띄우고 종친과 더불어 주안을 베풀고 강변에서 군사들이 씨름하는 광경을 보며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송경지(松京志)의 실록에 의하면 5월 5일 단오절(端午節)에 명절놀이로서 관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여아(女兒)들은 추천(贖韆)놀이를, 남자는 각저의 희, 즉 씨름경기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정조(正祖) 때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그림에 씨름하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



삼국 시대



1950년 고구려의 옛도읍지인 만주 통화성 즙안현 통구 환도에서 우리 나라 씨름에 관한 최 고의 사료인 씨름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 귀족으로 추정되며 시신이 놓 인 현실이 주된 곳으로 사방문에 흰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묘주인의 생활장면과 영혼불멸의 내세관을 채색으로 그려 놓았다.

장천1호분은 시신을 모신 묘실과 그 앞의 전실등 두개의 방이 있다 전실의 쪽 면을 가득 채운 풍속도에는 사냥 씨름 나들이 재주부리는 원숭이 매사냥 등 고구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전해주는 각종 장면들이 한 장의 그림 안에 모아져 있다. 등장인물만도 40명이 넘는다. 이 두 그림을 볼 때 고구려인들이 씨름을 매우 즐겨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나 백제에는 씨름에 관한 그림이나 문헌들이 없고 그 지방의 전통적인 민속들이 속에 남아 있다. 단오나 한가위 속에 씨름경기가 그 예이다.



삼한 시대



이 시대의 씨름에 관한 자료로 볼 수 있는 기록으로는 두 종류가 있다. 중국쪽 기록으로서 "후한서"와 우리쪽 자료로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이다.

후한서를 보면 중국의 한나라 왕은 부여의 왕이 자기 나라를 방문했을 때 환영 행사로서 북치고 피리불고 각저희를 하게 했다 이 각저희가 씨름과 유사하다.

띠를 매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의 우리 씨름과 비슷하다. 나라들간에 왕들의 방문 환영 행사로서 각저가 행하여 졌다는 것은 서로의 관심과 상당한 이해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거룩하고 신성한 장소인 신소도에서 행하는 제사 예식으로서 여러가지 기예를 시범하는 종목으로 "씰흠"을 말하고 있다. 이 "씰흠"이 씨름이 아닌가 한다. 삼한시대와 상고시대의 구별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한 구분이다.

상고시대는 역사적으로 쟁점이 되어 있고 삼한시대는 씨름 연구가들이 씨름의 발생시대로 보고 있기 때문에 구분하였음을 밝힌다.

후한서를 보면 중국의 한나라 왕은 부여의 왕이 방문하였을 때 환영 행사로서 북치고 피리불고 각저희를 하게 했다고 쓰여 있는데 이 각저희는 씨름과 유사하다



상고 시대



아득한 상고 시대에는 씨름에 관한 자료들이나 문헌이 없다. 다만 씨름에 관한 명칭중 치우희하는 것이 있는데 이 치우희는 상고시대 치우천왕의 이름을 딴 것 같다.

치우는 무와 군에 절륜한 자로써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와 쇳가루를 먹고 산다고 했다.

씨름의 이름이 왜 치우희라는 천왕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는가는 알 수 없으나 이 치우 천완에 관한 자료들이 중국측이나 우리측에 조금 있다. 중국의 25사 우리쪽의 "한단고기" 중 "삼성기" 상하편이다.

그가 천왕이라고 하는 이유는 "신시역대기"에 의하면 치우는 14세 자오지한웅과 동일인이기 떄문이다.군신이요 무신이므로 군과 무가 씨름의 성격과 관계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스포츠로서의 근대화



소규모의 지역적인 지방 씨름이 성행되다가 1912년 10월 유각권 구락부의 주관으로 서울 단성사 극장에서 대회다운 면모를 갖춘 씨름대회가 처음으로 개최되는 것을 비롯하여 1915년 1월 서울 광무대 극장 주최로 그 극장에서 4주일 동안 씨름대회가 열리었다.

그후 씨름에 대한 점점 높아지는 열기와 관심은 1927년 조선 씨름 협회가 창단되면서 1927년 < 제1회 전조선 씨름대회 >를 휘문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 대회에서는 고등학교 단체전과 개인전을 구분하여 경기를 가지며 회가 거듭될수록 더욱 발전하는듯 했으나 1934년 11월 제6회 대회가 최종대회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2년 후인 1936년 조선 씨름협회에서 다시 < 제1회 점조선 씨름선수권대회 >를 조선 일보사 강당에서 개최하였다. 첫 대회에 100여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면서 1941년 제6회 대회를 마친 후 중단되었다가 1946년 대한 씨름협회로 협회 명칭을 바꾸며 다시 재건을 보게 되어 1947년 "전국 씨름선수권대회"가 7회부터 계속되기 시작하였다. 이 대회는 1998년 현재 제52회를 개최하였다.

일제 치하에서의 한국인들은 큰 씨름대회를 주최할 능력이 없었으며 권한이 주어지지도 않았다. 다만 융회 정책의 일환으로 대개 일본인 신문사의 주최로 잔치 형태의 씨름 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가 열리게 되면 입장료를 받고 간이음식점을 허가 해준 대가 등으로 상품을 구입하여 1등에게는 황소1마리 2등에게는 송아지 5등까지 쌀 광목 등의 상품이 주어졌다. 어떤 지역에서는 1등에게만 소를 주어 1등과 2등간의 상금격차가 매우 컸다고 한다. 씨름 경기장은 요즈음 경기장보다 두매 가량 큰 모래판을 사용하였으며 주위에 나무로 상사(특별 관람석)를 만들어 관람하기도 했다.

경기를 할 때 각각 흑백의 샅바를 매고 앉아서 샅바를 잡았는데 샅바 싸움이 별로 없었으며 양 선수 모두 무릎이 떨어지기만 하면 호각을 불어 경기 시작 신호를 하였다. 시합 기간은 보통 5일간 계속되었으며 3사람은 이겨야 비교를 통과하는 즉 본선에 출전할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대체로 120명 정도가 본선에 진출하여 토너멘트에 의한 경기방식으로 우승자를 결정하였는데 승부는 5판 3승으로 가렸으며 경기를 하는 시간 제한이 없어서 몇시간씩 한 게임이 연장되기도 했다고 한다. 심판은 순수한 씨름인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고 일본인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는 다른 스포츠 선수 출신 등을 시켰다. 물론 이들은 한국인들 이었지만 씨름을 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심판을 하는데 있어 문제점이 많았다. 그러나 심판의 권위가 대단하여 항의를 하거나 불만을 나타낼 수 없었다. 이 시기에 많이 사용한 기술로는 배지기 안다리 결기 앞무릎치기 등치기 밧다리 걸기 차돌리기 덧거리 등 오늘날 선수들이 많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술이 존재하였다.

큰 도시에서 연 1~2번 지방에서도 1번 정도 큰 대회가 열렸으며 면소재지 정도의 시골 씨름 대회는 지서(현 파출소)에 신고를 하면 벌릴 수 있는 난장판 씨름 대회였다. 경기 사이 사이에는 우승할 때마다 기생들의 지화자 타령에서 장고춤 등이 곁들여 지기도 했으며 우승자는 상품으로 탄 황소를 타고 시내를 일주 한 후에는 팔아서 후배나 타 지방에서 온 우수 선수들에게 상금을 나누어 주는 등 정이 흐르고 멋이 있는 전통이 있었다. 야구 축구 정구 등의 딴 대회도 개최되었으나 관중이 별반 없었고 씨름은 대단한 인기가 있어 인산 인해를 이루며 상사가 내려 앉은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선수들은 평소에 연습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특별히 영양식을 하지도 못했다. 시합 전 생계란 몇 개 먹고 나오는게 고작이었으나 천부적인 힘과 소질을 타고 나야 했던 시대라고 보아진다.

씨름경기는 기본 방식에 전국적으로 공통성을 가지고 있으나 씨름 형태에 있어서는 지방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며 씨름과 관련된 풍속도 지방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씨름은 아시다시피 그냥 씨름입니다. 알아서 하세요

좀 짧게 쓸게요;



옛날 삼국시대에도 씨름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려사'에 보면 왕이 아이들과 함께 씨름을 즐겼다는 내용도 나와있는데요.



씨름이 나온 뒤 점점 번성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걸로 알고있습니다.



음...너무짧나요....죄송합니다..


씨름은 순수한 한국어이며, 이밖에 각저( 또는 觝)·각력()·각희()·상박() 등의 한자어 별칭이 있다. 씨름은 원래, 원시사회에 있어서는 맹수나 타종족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살 수 있었으므로 생활수단으로서 투기() 또는 자기를 보호하는 무술로서 행하여졌던 것이다. 그리고 차차 인간이 지적()·정서적·사회적 발달에 따라 무예로 발전하였다.



씨름은 농경사회의 제례행사의 여흥의 하나로서, 음력 5월 5일 단오절이 되면 남자들은 마을간에 힘을 자랑하는 내기로서 넓은 모래사장이나 잔디밭에 모여 씨름경기를 하였다. 음력 7월 보름이 되면 백중()이라 하여, 각 지방에서 힘이 센 장사들이 많이 모여 수백 명의 관중 앞에서 힘을 겨루는 씨름을 하여 천하장사를 가려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음력 8월 한가위, 즉 추석 명절이 되면 경향() 각처에서 힘이 세고 거대한 체구의 장사들이 많이 모여들어 자기 고장과 자신의 명예를 걸고 우승을 쟁취하기 위해 씨름경기에 참가하였으며, 장사들은 맞붙은 상대를 이기기 위하여 서로 부둥켜 잡고는 당기고, 들고, 밀고, 허리를 돌리고, 다리를 걸고, 감고 또 되치기를 하며 자기의 기술을 총동원하여 최대의 힘을 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지막으로 이긴 자에게는 부상()으로 황소 한 마리를 상으로 주었다. 이와 같이 마지막 우승자에게 황소를 주는 풍습은, 옛날에는 씨름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다는 점과 또한 한국은 예로부터 농업을 천하지대본()으로 숭상하는 농업국이므로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라고 격려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씨름 | 네이버 백과사전

힘과 기술를 부리어 상대를 먼저 넘어트리면 승리 하는 게임입니다


그리고 샅바나띠를 넓적다리에걸친두사람이 서로 부둥켜 잡고 힘과 재주를 부려서 하는 게임이다


채택 부탁 늦었지만^0^


1. 씨름이란?


* 씨름의 정의


씨름(ssirum)은 순수 한국말이다. 두 사람이 상대방의 샅바를 잡고 주심의 지시에 따라 서로의 기술과 힘을 겨루어 상대방의 신체부위 중 무릎 이상이 지면에 먼저 닿는 것으로 승패를 결정하는 경기를 말한다.



* 씨름의 특징


신체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방의 중심을 무너뜨려서 승패를 결정하는 가장 인간적인 경기라는데 있다.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다양한 기술과 힘으로 승패를 결정짓는 씨름이야말로 인본주의 사상에 입각한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 씨름의 역사


씨름은 시대에 따라 각저()·각저(觝)·각력()·각희()·상박()등으로 전해왔으며 명칭만 다를뿐 모두일맥상통한 기술로써 경기를 행했다.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엔 두사람이 맞붙어 힘겨루기를 하는 벽화가 있으며 고려 시대에도 궁내에서 씨름을 즐겼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씨름은마을과 마을의 행사때 제례의식으로써 모습이 바뀌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이 되면 남자들은 자기 마을과 이웃 마을 사람들과 힘을 자랑하는 내기로서 넓은 모래사장이나 잔디밭에 모여 씨름경기를 하였다. 음력 7월 보름이 되면 백중()이라 하여, 각 지방에서 힘이 센 장사들이 많이 모여 수백 명의 관중 앞에서 힘을 겨루는 씨름을 하여 천하장사를 가려내기도 하였다.


음력 8월 추석 명절이 되면 경향() 각처에서 힘이 세고 거대한 체구의 장사들이 많이 모여들어 자기 고장과 자신의 명예를 걸고 우승을 쟁취하기 위해 씨름경기에 참가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이긴 자에게는 부상()으로 황소 한 마리를 상으로 주었다. 이와 같이 마지막 우승자에게 황소를 주는 풍습은, 옛날에는 씨름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다는 점과 또한 한국은 예로부터 농업을 천하지대본()으로 숭상하는 농업국이므로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라는 뜻에서 황소를 부상으로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세종실록 50권에 이르길,"세종 13년 3월 모화관에 거동하여 격구, 활쏘기, 기마술과 모구(毛毬)등 경기를 구경하고 그중에서 5명을 뽑아서 씨름을 하게 하고 상을 줌에있어 차등을 주었다"라는 기록을 볼때 고려왕실에 이어 조선왕실에서도 씨름을 즐겼다는것을 알수 있다.



한국의 씨름이 근대에 와서 뚜렷한 단체나 기관의 주관하에 최초로 개최된 씨름대회는 1912년 10월 유각권구락부(柔角拳俱樂部) 의 주관으로 서울 단성사에서 열린 대회였다. 그 뒤인 1915년 서울 광무대(光武臺)극장 주관아래 그해 음력 1월부터 4주일동안 열렸으며, 그 후로도 한동안 연례행사로서 같은 극장에서 씨름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 것은 오늘날과 같이 조직적인 체육대회의 씨름대회라기 보다는 다분히 흥행성을 띤 대회였다. 그러나 종래의 민속적인 유희(遊戱)에서 탈피하여 현대적 경기로의 발전을 목적으로 개최된 씨름대회는 조선씨름협회 주최하의 [전조선씨름대회]가 처음이다.


조선씨름협회는 일찍이 일본에서 체육의 근대교육을 받고 돌아와 당시 서울시내 각 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고등학교)체 조교사직에 종사하던 강낙원(姜樂遠), 서상천(徐相 天), 한진희(韓軫熙), 강진구(姜軫九) 등의 발기로 1927년 창립되었으며, 그해 9월 창립기념 [제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개최 했다. 경신학교(儆新學校), 중앙고보(中央高普), 보성고보(普成高普), 휘문고보(徽文高普), 협성실업(協成實業), 양정고보(養正高普), 숭의상업(崇義商業)의 7개교가 출전하여 단체전은 경신학교가 우승하고 개인전은 함흥출신의 이도남(李道南) 선수가 차지했다.


그 뒤 7년동안 계속해 오던 씨름대회는 1934년 11월 제6회 대회로써 중단된다. 2년후인 1936년 새로 거듭난 씨름협회는 조선일보사 강당에서 [제1회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를 개최하여, 100여명의 선수가 참여하는 대성황을 이룬다. 그러나 이 씨름대회도 6회대회를 끝으로 1947년 제7회 대회를 개최하기까지 5년간 중단하게 된다. 1942년부터 일본 통치하에서 해방이 되던 1945년까지는 태평양전쟁이 가열하던 시기로써 일본이 총력을 기 울이던 비상시기라 그때 형편으로는 도저히 씨름대회를 개최할 수 없었다. 또한 해방후 1947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1년전인 2년동안 미군정이 실시되어 정치 혼란기였으므로 또한 대회를 치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씨름협회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재건(再建)을 보게 되는데 그 명칭도 대한씨름협회라 하였으며, 이 때의 회장은 제3대로서 서상천(徐相天)씨 였다. 1936년 혁신후의 씨름협회 제1대 회장은 여운형(呂運亨)씨가, 제2대 회장은 이극노(李克魯)씨가 회장 이었다. 이 [전국씨름선수권대회]는 1947년 제7회 전국대회가 개최된 이래 오늘날까지 계속 되어 오고 있다.



오늘날 씨름은 근대를 거치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기본 기틀을 다진 씨름이 방송과의 유기적인 협조로 전국적인 붐 을 일으키며 프로화를 통한 국제적 경기로 거듭나는 시기이다. 씨름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시기는 1972년으로, 그해 9월 24일 ~ 26일까지 장충체육관에서 대한씨름협회와 KBS가 공동주최 하고 문화공보부가 후원한 [제1회 KBS배 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였다. 이전까지 야외 모래판에서 실시하던 것을 실내의 매트에서 하게 되었고 경기가 열리는 3일동안 KBS-TV에서 중계방송을 전국으로 실시하여 전국민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 경기를 보게 되었다.



이제까지 뉴스로만 취급되어오던 씨름이 중계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중계되었다는 것이 씨름발전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특히 경기가 열리는 장충체육관은 인기 종목인 구기종목의 국제적인 경기가 있어야만 관중이 1,2천명 정도였으나 씨름한판승이 열리는 연 3일동안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체육관을 빈틈없이 꽉 메웠으며, 관중의 일부는 서울근교나 지방에서 온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이 경기에서는 예선을 거친 8명의 장사가 풀리그전으로 거행된 경기에서 우승은 마산의 김성률(金成律), 준우승은 경북의 박범조(朴範祚), 3위는 마산의 정근종(鄭根種)이 었다. 그 후로는 인기를 유지하다가 축구, 야구, 기타 인기종목에 눌려 70년대 후반에는 시들한 느낌마저 들정도로 침체된 듯 하엿다.



80년대 들어 제5공화국이 출범하여 스포츠 장려정책과 함께 82년 4월에 출범한 한국 민속씨름위원회가 KBS와 공동 주최하는 제1회 천하장사씨름대회를 계기로 다시한번 크나큰 인기를 끌게 된다. 이 대회부터는 실내에서 매트위에 경기를 해오던 것을 처음으로 모래로 바뀌게 하였고 체급도 4체급으로 구분하여 시행하였다. 체급명칭 또한 우리나라의 명산의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서 태백급(75kg 이하), 금강급 (75kg 이상 85kg 이하), 한라급(85.1kg 이상 95kg 이하), 백두급(95.1kg 이상)으로 정하고 체급의 제한없이 무제한으로 출전하는 천하장사(天下壯士)전이 있었다. 천하장사 결정전에서는 450여명의 선수들이 출전한 가운데 결승전에서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이준희(李俊熙)와 홍현욱(洪顯旭)선수를 물리치고 올라 온 한라급의 이만기(李萬基)선수와 최욱진(崔旭珍)선수가 맞붙어 이만기 선수가 3:2로 이기고 천하장사의 칭호와 함께 1천5백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당시의 쌀 한가마 값은 4만원 정도)



경기방식에 있어 변화가 있었다면 종전에는 매트위에서 경기를 하던 씨름이 모래위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으며 , 경기장의 직경을 7m에서 9m로 늘리며 밀어내기를 없애 경기장 안에서 승부가 나도록 했다. 대전방식은 토너먼트(맞붙기)로 3판2승제, 장사결정 전은 5판3승으로 하였다. 각 체급에는 청룡군(1군)과 백호군(2군)으로 나누어, 각 군에 8명씩의 장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1991년 9월부터는 체급을 변경하여 백두급(100.1kg 이상)과 한라급(100.0kg 이하) 두 체급만으로 나누었으며, 씨름단간의 대결을 위하여 단체전이 신설되었다. 1982년 출범한 민속씨름위원회는 1983년 대한씨름협회와 통합 운영되었으나 1990년 9월 체육부장관으로부터 사단법인 '한국민속씨름협회'로 승인을 받아, 1991년 2월부터 대한씨름협회와 분리, 프로씨름을 독자 운영하기로 했다. 1994년 제8대 김재기 회장의 취임으로 협회 명칭을 사)한국민속씨름위원회로 바꾸며 회장을 총재로 변경 사 용하는 정관을 통과시키며 씨름의 위상을 한단계 높인다.



1996년에는 씨름의 국제화와 세계화를 위해 사)한국민속씨름위원회를 다시 사)한국민속씨름위원회으로 개정하고, 전문위원의 기능을 강화해 그해 설날장사씨름대회부터 의식무와 선수몸본 등을 처음으로 시행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시기는 씨름단의 연이은 창단으로 8개씨름단 총 100여명의 선수가 활동했으며 KBS중계료의 인상으로 인한 기금확충 등 내적, 외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로 보여 진다. IMF이후 씨름단의 해단으로 LG투자증권 황소씨름단, 현대중공업 코끼리씨름단, 신창건설 코뿔소씨름단, 등 3개 단으로 운영돼 오던 프로씨름은 2004년 12월 6일 LG투자증권 황소씨름단이 해단되므로써 현재는 현대중공업 코끼리씨름단, 신창건설 코뿔소씨름단 등 2개 씨름단이 운영되고 있다.




2. 씨름의 기술



오랜 옛날부터 전해지던 씨름의 기술들을현대에 들어 체계화 시켰다.오늘날 씨름경기의 기술들은크게 손기술 10개, 다리기술 5개, 허리기술 4개, 종합기술 8개가 있다.



손기술


[앞무릎치기], [뒷무릎치기], [오금당기기], [옆무릎치기], [발목당기기], [팔걸어앞무릎치기], [팔걸어잡채기] [모둠앞무릎치기], [앞무릎뒷무릎치기], [뒷무릎안다리치기]



다리기술


[밭다리걸기], [안다리걸기], [호미걸이], [발목등걸이], [덮걸이]



허리기술


[들배지기], [엉덩배지기], [돌림배지기], [밀어치기],



종합기술


[잡채기], [차돌리기(오른쪽)], [목돌리기], [정면뒤집기], [우로뒤집기], [좌로뒤집기], [목말아뒤집기], [팔걸어뒤집기]




3. 씨름에서 지켜야 할것들



* 경기장


지름이 8m인 원형의 모래판에 경기장의 높이는 40cm이상이며 모래의 깊이는 25~30cm 이내로 한다.



*샅바


씨름을 할 때 사타구니와 허리에 걸어서 손잡이로 사용하는 무명으로 만든 "띠"를 말한다. 샅바의 재질은 모두 [광목] 으로써 16수 전폭으로 제작, 사용한다.

샅바의 규격은 허벅지 둘레보다 길이를 14Cm크게 고리를 만들어 오른다리에 걸고 바는 허리에 둘러멘다. 색깔은 청색, 홍색을 쓰는데 예전에는 흑,백색으로 사용해 오던 것을 민속씨름이 출범한 후 1983년 4월14일 장충 체육관에서 개최된 제1회 천하장사씨름대회부터 청,홍으로 바꿔 사용했다.



* 룰


원형의 모래판위에 양선수가 앉은 자세에서 서로의 샅바를 잡고 일어선 후 주심의 신호에 따라 경기를 시작한다. 씨름의 승패는 무릎이상의 부분이 모래판에 먼저 닿는 선수가 지게되며, 경기장밖으로 나가면 무효가 된다. 단 기술을 거는 선수의 발이 경기장 안에 있고 상대방이 기술에 걸린 상태에서 경기장 밖으로 넘어지면 유효하다. 한판의 경기시간은 2분이며 휴식시간은 1분으로 한다. 경기방법은 단판제, 3판다승제가 있다.



단판제 : 첫판 승패없이 끝나면 경고나 주의를 받는 선수가 패자가 되며, 경고나 주의가 없으면 경체자가 승자가 된다.



3판다승제 : 2승을 먼저 하는 선수가 승자가 된다.첫판 이기고, 둘째판 승패없이 끝나면 첫판을 이긴 선수가 승자가 된다. 첫판 승패가 없을 경우에는 둘째판에 이긴 선수가 승자가 된다.

두 번째 판 경기 후 승패가 0:0 또는 1:1일 경우에는 세 번째 판에서 이기는 선수가 승자가 된다. 셋째판 경기후 승패가 0:0 또는 1:1 동점일때 경고 및 주의를 받은 선수가 패자가 되며, 경고 및 주의가 없으면 경체자가 승자가 된다.



* 체급


백두장사급, 한라장사급, 금강장사급, 태백장사급으로 구분 한다.

정규대회 및 설날ㆍ추석대회는 각 체급별 장사를 선발하고, 천하장사대회는 천하장사전, 금강ㆍ한라통합장사 대회를 별도로 실시한다.



백두장사급 : 105.1 kg 이상

한라장사급 : 90.1 kg 이상 ~ 105.0 kg 이하

금강장사급 : 80.1 kg 이상 ~ 90.0 kg 이하

태백장사급 : 80.0 kg 이하




4. 씨름으로 이름을 날린 장사들



최다출전, 최다승자


1. 이태현 : 백두급, 630전 472승 158패


2. 신봉민 : 백두급, 568전 409승 159패


3. 김경수 : 백두급, 560전 395승 165패


4. 김영현 : 백두급, 463전 335승 108패


5. 황규연 :백두급, 446전 286승 160패



최고승률


1. 최기태 : 태백급,77.8%


2. 김영현 : 백두급, 76.7 %


3. 윤원철 : 금강급, 75.9%


4. 구자원 : 태백급, 75%


5. 이태현 : 태백급, 74.9%



역대 천하장사대회 최다우승자


1. 이만기 :1회, 2회, 4회,6회, 7회,9회, 11회, 14회, 15회, 16회


2. 강호동 : 18회, 19회, 20회, 23회, 24회


3. 이준희 : 5회, 8회, 13회


4.백승일 : 28회, 29회, 31회


5. 이태현 : 32회, 2000년, 2002년



가장 큰 선수


1. 최홍만 :218cm


2. 김영현 :217cm


3.이봉걸 : 205cm


4. 김경석 : 200cm


5. 이태현: 196cm



최연소 천하장사대회 우승자


강호동(20세)



천하장사대회 최단기간 우승자


최홍만(2002년 12월 프로 입단, 2003년 12월 인천 천하장사 대회 우승)




귀여운 딱국질과 웃음

귀여운 딱국질과 웃음
출처:http://www.savemoon.co.kr/21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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